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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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좋다.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다. 다른 내가 될 수 없기에 나를 좋아한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음일까, 아니면 나를 좋아하려고 노력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SF 소설처럼 어딘가 다른 내가 존재해 다른 삶을 산다고 상상해도 그 삶은 나이지만 내가 아니고 나는 그 삶을 좋아할 수 없다. 여기 있는 나의 삶만이 내가 아는 나의 삶이니까.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나의 삶이 더욱 소중할 수밖에. 나의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곳으로 나를 데리고 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면서 내 삶을 더 좋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내 삶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뿌듯함이라고 할까. 김영하 작가가 알려주지 않아도 인생은 일회용이다. 알고 있다. 주어진 생은 한 번뿐이고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고.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고. 근데 그게 어디 쉬운가. 그런 깨달음을 쉽게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에도 곧 수긍하게 된다. 내 삶이니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내 삶은 소중하니까.


고백하지만 김영하의 에세이를 기다렸다거나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고 그게 좋았다. 작가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부모님의 죽음, 작가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젊은 시절, 시간이 지나고 돌아본 20대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이 책이 아니면 나는 몰랐을 것이다. 몰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나는 엄마의 처녀 시절이 궁금해졌고 그 시절을 아는 이(엄마의 형제)가 단 한 분(이모) 남았다는 사실이 슬펐다. 이모와 나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기 때문이다. 어째서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 인생, 알고 싶다고 느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답을 얻지 못하는 것. 그러니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것.


그 모든 걸 미리 알았다고 해서, 나의 미래를 알았다고 해서 행복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알기 때문에 궁금하지 않고 알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그러니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은 그의 선택은 현명하다. 혹자는 당신이 가능성을 언급했더라면 누군가의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것이고 외부의 영향은 아주 미세하게 작용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61쪽)


나이가 들수록 좋은 건 쉽게 흥분하지 않고 순간의 감정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과거의 나보다 훨씬 수월하다. 내가 변한 것처럼 나와 연결된 이들도 변한다는 사실이다. 매번 나의 잔소리를 귀찮아하던 조카가 그때 이모의 말을 이제 알겠다고 말하는 조카도. 어디 그뿐인가. 이제 내게 단 한 사람의 사랑만이 전부이고 그게 없다면 끝날 것 같은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감정은 소중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은 너무 많다는 걸 안다. 김영하 작가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가 요가를 하고 정원이 있는 주택에 살고 이십 년 넘게 수동 커피 분쇄기가 있는 줄 영영 몰랐을 것이다. 대단하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가 솔직하게 들려주는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은 꽤 감동적이다. 아마도 내가 젊지 않고 늙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지만 그들이 인생이라는 게임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와 있는지 속속들이 알 도리가 없다. (151쪽)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간다. 어제를 후회하고 오늘을 반성하며 내일을 기대한다. 놓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안달복달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아직 5월인데 봄은 사라진 것 같다. 아차 하는 순간, 모든 게 지나간다. 한 번뿐인 인생이 그러하듯. 내 인생만 그러하지 않다는 게 큰 위안이다. 모든 걸 지우고 다시 그리고 다시 채워 넣고 싶은 삶일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다. 그 모든 게 나의 삶이었으니까. 나는 내가 좋고 앞으로도 내가 좋을 예정이다. 단 한 번의 내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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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5-05-2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에세이도 참 좋습니다.

자목련 2025-05-28 10:56   좋아요 0 | URL
저는 보물선 님의 댓글이 참 좋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blanca 2025-05-27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김영하 작가에 대해 새로운 면면들을 알아가게 돼서 참 좋았어요. 피상적으로 비치는 사람의 인상을 가지고 전부를 판단하지 말아야겠다, 싶었고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스스로를 좋아하는 자목련님 모습이 참 좋네요.

자목련 2025-05-28 10:57   좋아요 0 | URL
네, 잘 모르면서 혼자 지닌 편견이 참 무섭겠다 생각도 했어요. 저를 더 좋아하도록 노력하려고요!

꼬마요정 2025-05-28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글 너무 좋아요.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자목련 2025-05-28 10:58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 님의 댓글이 무지 무지 좋습니다.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콜롬비아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나에어로빅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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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알라딘 커피에 빠져든다. 커피가 남았는데 완벽하다는 소개에 냉큼 주문. 땡스투는 그분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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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
클레어 풀리 지음, 이미영 옮김 / 책깃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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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고리타분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지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일은 없다고 여겼다. 그들에게 듣고 배우는 삶의 지혜가 나를 키웠다는 걸 잊고 있었다. 노인의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들여다보려 한 적이 없었기에 부끄럽게 생각한다. 나는 늙고 있고 다가올 노년의 삶은 당연한 일인데. 클레어 폴리의 『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 은 그래서 더욱 인상 깊고 특별하게 남은 소설이다.


세상에나, ‘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이라니 어떤 클럽일까. 가입 조건이 까다로운 곳일까, 아니면 최고령 노인들이 대단한 것일까.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함께 사교 클럽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 영국 런던의 작은 마을 해머스미스의 낡고 오래된 주민센터에 일주일에 세 번 오후에 열리는 사교 클럽이 있다. 주인공 ‘대프니’는 일흔 번째 생일을 맞아 아파트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로 시작하고 사교 클럽에 가입했다. 이곳에 이사 온 지 15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15년 만에 처음으로 타인과 만났다는 게 맞겠다. 연애도 할 수 있겠다는 기대와 다른 것도 모자라 사교 클럽 첫날에 사건이 일어난다. 천장이 무너져 사교 클럽 회원 한 명이 사망했다. 키우던 개를 남기고 말이다. 대프니는 리디이와 아트와 함께 돌아가며 개 매기를 맡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의회는 낡은 복지관을 부수고 아파트를 짓겠다는 공고를 냈다. 사교 클럽 운영자인 ‘리디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대프니뿐 아니라 사교 클럽과 복지관을 이용하는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다. 19살 미혼부 ‘지기’는 딸 ‘카일리’를 맡아줄 유아원이 필요했다. 말 못 하는 다섯 살 아이 ‘러키’, 주인을 잃은 개 매기까지.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복지관 운영에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했다. 유아원 아이들의 성탄극으로 관심을 모으기로 한다. 은퇴한 배우인 아트가 연출자로 연극 공연과 축제 분위기라면 승산이 있었다. 공연 당일 아트가 집에서 가져온 스타벅스 물건들만 없었더라면 말이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아트에게는 물건을 훔치는 이상한 취미기 있었다. 연락이 닿지 않는 딸과 손녀의 빈자리 채우기 위한 아트만의 방법이라고 할까.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으니 멈출 수가 없었다.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좋은 마음이었지만 스타벅스 매니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매니저는 경찰에 신고한다고 소리치고 곤경에 처한 아트를 구한 건 대프니였다. 대프니는 아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소리쳤으니까. 대프니가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지기도 대프니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보충 공부를 하는 동안 대프니가 카일리를 돌봐주고 있었으니까. 사실 리디아도 그랬다. 성장한 두 딸은 리디아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고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대프니는 그런 리디아를 지나칠 수 없었다. 매기를 맡기러 온 리디아를 집 안으로 들였다. 이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리디아가 새로운 시작을 하기를 바랐고 변신을 위해 자신의 옷을 내어주었다. 그녀가 당당하고 멋진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응원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복지관을 구할 수 있을까? 실의에 빠진 아트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의회는 아파트 짓기에 더욱 적극적이다. 다시 대프니가 나서야 했다. 우선 아트에게 전화를 거니 다른 남자가 받고 상황을 설명한다. 대프니가 한 번 더 아트를 구했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다 걸린 아트는 치매에 걸린 대프니의 남편이 되었으니까. 대프니의 곧바로 물건으로 가득 찬 아트의 아파트도 정리한다. 리디아와 복지관 이용자들이 함께 도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복지관을 이용자에 불과했던 사람들은 복지관이 없어지기 않기를 바랐고 그 중심에는 대프니가 있었다. 대프니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정녕 모두가 대프니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연대하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어려움을 나누고 해결하려 노력한다. 그 모든 일에는 대프니의 말이 주문처럼 따라온다.


“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죠.” (303쪽)


대프니는 한 번의 상처와 실수로 삶을 포기하고 좌절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믿음을 안겨준다. 미혼부 지기에게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도와주고 홀로 외롭게 지내는 아트를 세상 밖으로 이끌고 리디아에게 남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니 당신이 예상한 대로 복지관을 고치고 운영할 기금 모집도 성공한다. 물론 그 방법은 알려줄 수 없다. 당신이 멋진 대프니를 만날 기회를 날려버리면 안 되니까.


궁금하지 않은가? ‘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말이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대프니의 활약을 직접 마주하길 바란다. 유머 넘치고 감동까지 안겨주는 소설을 놓치지 않기를. 분명 호쾌한 대프니의 매력에 흠뻑 빠질 것이다. 따뜻한 소설을 찾는다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하다면, 『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을 만나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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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5-21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
뭘까요?
엄청 궁금한데요^^

자목련 2025-05-23 15:55   좋아요 1 | URL
재밌게 읽었어요. 예상했던 해피엔딩이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전개도 있고요!

hnine 2025-05-22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영국 출신이라니 이 소설의 분위기가 상상이 되어 흥미가 생기네요. 노인이 활약하는 소설들이 재미있는 것들이 꽤 있지요. 고리타분하게 집을 지키는 노인들이 아니라 활약하는 노인들이 나오는 책, 영화, 드라마, 환영이요.

자목련 2025-05-23 15:56   좋아요 0 | URL
네, 멋지게 활약하는 노인의 모습이 좋았어요!
시트콤으로 만들면 좋겠다 싶은 생각에 배우 김영옥, 선우용녀를 떠올리기도 했어요^^
 
모린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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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것 같은 마음이 있다. 알 것 같은 것이지 아는 것 아니다. 그 마음을 아는 건, 오직 마음의 당사자뿐이다. 비슷한 상황,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기에 상태를 짐작한다. 주저하고 조심한다. 마음은 유일한 것이고 마음은 소하니까. 안윤의 소설집 『모린』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마음 곁에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깨질 것 같은, 얕은 숨에도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마음을 지키려 애쓰는 마음을 보았다.


표제작 「모린」 은 고객의 불평불만을 상담하는 ‘미란’과 장애인 ‘영은’의 이야기의 사랑 이야기로 읽을 수 있고 상실과 회복에 대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시각 장애인 낭독 봉사를 하는 미란은 그곳에서 영은을 처음 만났다. 자신의 전부였던 할머니를 잃은 미란에게 다가온 영은.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과 서로를 향한 마음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 무엇이든 다 말하고 싶은 상대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존재. 소설 속 가장 선명하게 남은 문장처럼 유일한 사람.


모린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모린」, 9쪽)


설령 헤어졌다고 해도 그 고유함은 사라질 수 없다. 누군가를 알고 사랑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미처 전부를 다 알지 못해도 애서 지우려 해도 끝까지 남아 있는 어떤 것이 있으니까. 그래서 먼 훗날 가만히 떠오르는 기억에 이름을 불러보게 된다.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한때 당신에게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서로의 전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랑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도 한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별을 한다. 「담담」 속 ‘혜재’와 ‘은석’처럼 말이다. 11년이라는 긴 연애를 끝낸 혜재는 소개로 만난 은석에게 양성애자라 말한다.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은 은석에게 혜재의 정체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은석에겐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이 그러했으니까. 「담담」이란 제목처럼 둘의 만남은 그렇게 지속되고 서로에게 스며든다. 일부러 캐묻지 않고 일상을 공유한다. 무엇 때문에 슬픈지, 무엇이 상처로 남았는지 말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그 마음이 어떤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털어놓은 일과 서로를 이해하는 일, 한 사람을 아는 일 간에 정확히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그것이 관계에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지 갈수록 알 수가 없어진다. 서로를 이해하는 일, 한 사람을 아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조차도. (「담담」, 121쪽)






안윤이 그리는 관계는 밀착이 아닌 떨어진 사이다. 그러니까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정도라고 할까. 그건 그림자까지 보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 게 느껴져서 나는 안윤의 소설이 좋았다. 읽을수록 좋아졌다. 「모린」과 「담담」에서 상처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마음, 남겨진 흉터를 어루만지는 마음이 전해졌다.


그런 마음은 「하지夏至」에서도 만난다. 서울에서 제과점을 하던 ‘수림’은 모든 걸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서울을 떠나기 전 오랜 친구 ‘지언’과 이별 캠핑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수림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저 곁에서 이별을 준비하는 지언. 수림이 얼마나 힘들고 지쳤을지 짐작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믿음이 있기에. 수림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지언은 너는 잘 지내라는 문자를 보낸다. 수림을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잘 지내지 않고 괜찮지 않더라도 잘 지내고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 수림이 아닌 내가 회복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계절이 바뀌고 낮이 길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천천히 회복될 거라고.


너는 잘 지내. 그건 마치 지언이 내게 거는 주문 같았다. 너는 잘 지내. 그 주문에 단단히 걸려들고 싶었다. (213쪽)


낮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 나는 안다, 때가 되면 다시 점점 길어지리라는 것을, 어김없지만 전과는 같지 않을 낮이. (「하지夏至」, 214쪽)


직접적으로 묻거나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어떤 상처와 마음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건 상대를 향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 욕망이 아닌 그런 마음. 서툴고 어려워서 시간이 지나서야 보인다. 초라했던 이십 대 초반을 떠올리는 ‘의선’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던 ‘준수’를 회상하는 「작은 눈덩이 하나」. 그 시절 의선에게 유일한 사람은 준수였을 것이다.


그런 유일한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어떨까. 아무런 징조 없이 증발해 버린다면. 「틈」에서 ‘사희’가 그러했다. ‘인애’는 사희를 수소문하지만 찾을 수 없다. 사희는 이혼을 했고 사라졌다. 나중에야 사희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다. 우연하게 잡지에 실린 사희를 보고 무작정 찾아간다. 구 년 만에 사희는 인애를 근처 저수지로 안내한다. 그 풍경을 사진에 담으면서 그곳에서 다시 살아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량하고 덧없는, 무위에 가까운 풍경들, 자신의 내면과 어딘가 닮은 대상들을 포착했다. 뷰파인더를 들여다볼 때 사희는 철저히 관찰자가 되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건너다보고 있다는 감각이, 거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고작 찰나를 붙잡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위안을 줬다. (「틈」, 240쪽)


인애에게 사희가 유일한 사람이었던 시절은 과거가 되었다. 아니 그 시절을 통과했다고 할까. 사희에게 인애의 사과나 위로가 필요한 시간도 지나가 버렸다. 놓쳐버렸다는 게 맞겠다. 사희가 보낸 시간을 알 길이 없고 그 시간을 놓쳤지만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거리가 생긴 것이다.


안윤은 이처럼 저마다의 유일한 사람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각자의 삶 속에서 유일한 사람을 지키려 노력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거라고. 마음을 온전히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런 기억을 품고 살아가도 충분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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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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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좋아하는 알라딘 커피를 찾았다. 나는 이 커피가 좋아서 선물하고 소개하고 함께 마시는 기쁨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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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5-05-1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방금 마셨는데 맛있네요!

자목련 2025-05-13 11:23   좋아요 1 | URL
이커피 정말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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